"둑코 전투" -번개부대의 용맹-



둑코(Duc Co)는 중부월남과 캄보디아와의 국경지대 부근으로써,
베트민군이 호지명 보급로를 거쳐 월남에 침투하는 경로상의 요충지(要衝地)이다.
월남의 프레이쿠(Pleiku)성과 캄보디아의 라타나아키리(Ratanakiri)주가 접한
국경선 동편의 19번 도로와 야드랑(la Drang)강 사이에 있다.
이 일대는 평균표고 190m 내지 300m 정도의 야간이 원시림으로 덮여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샛강이 얽혀 있다.

이 지역 일대에는 모타나아드(Montagnard)족이 살고 있으며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재배된 고무나무와 바나나 밭이 황폐된 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야드랑 강은 동쪽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캄보디아의 서쪽에 흐르는 국제 강으로서
그 폭이 30m 내지 40m이고 수심은 1.5m 정도로 도보로 건너기는 곤란하다.

지대 내에는 2m 높이로 자란 잡초가 무성하고 수목이 우거진 탓으로
도보행동과 관측 및 사계(射界)에 제한을 주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공산군들은 지형에 익숙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자유자제로 활동함으로써
연합군으로부터의 위협을 덜 받기도 한다.

특히, 그들은 상황이 불리하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이른 바 그들의 성역(聖域)으로
퇴각하므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에 여러 가지 애로가 있다.
물론 이 지역은 맹호사단과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전술책임지역을 아니며,
더욱이 한국군의 작전에도 아무런 연관성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지역에 기갑연대와 제 3 대대가 주둔하게 된 것이다.
이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제 1 야전군은 1966년 3월 25일부터 그 예하의 제 1 공중기갑사단과 제25보병사단을
캄보디아 국경선 부근의 이 일대에 투입하여 베트민군에 대한 공세에 나섰다.
이것은 ‘링컨(LINCOLN)작전’이라고 부르며, 뒤를 이어 사단규모의 작전을 계속하면서
베트콩에 대한 보급원(補給源)을 차단하고 베트민군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적의 진원지(震源地)를 말살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5월 10일부터는
미제25보병사단의 제 3 여단이 푸레이미(Pleime)와 추퐁(Chupong)산 사이에
전개하여 펄리비어(PAUL REVERE)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투지대의 넓이에 비하여 가용병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심한 애로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에 미제 1 야전군사령부에서는 6월 24일에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소장에서
증강된 1개 대대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특히, 이무렵 맹호사단에는 증파부대인 제 26 연대가 도착되어 있었으므로
병력의 여유가 그 어느 때보다 충분하였다.
그러나 채명신 소장은 일단 미제 1 야전군사령관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표면상의 거절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맹호사단의 모든 장비는 미군과 달리 구식이다.
미군은 M16소총으로 무장되었지만 한국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M1소총과
카빈소총으로 장비되어 있었다. 특히, 통신장비는 그 교신 통달거리가 짧고
노후한 까닭에 원시림에서의 작전행동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

둘째, 사단전술책임지역 밖으로 멀리 떨어져 행동하는 부대에 소요되는 보급을
추진할 지원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셋째, 작전통제가 곤란할 것이다. 채명신 소장은 표면상 세 가지를 내세우며
반대하였지만 속셈으로는 더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고국의 국민을 의식한 것이다.
월남전은 명분이 중요하고 참전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지,
한없는 확전에 말려들어가 원시림의 벽지에 한국군을 투입하기 시작하면
어떤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이는 채소장의 작전개념에서 여실히 나타나 있다.
처음에 퀴논에 상륙한 맹호사단의 배치에 대해서도 미군 당국과 상당히 큰
견해 차이가 있었다. 미군당국은 사단 또는 연대단위로 집결보유한 뒤
작전지역을 광범위하게 누비며 미군처럼 집중 운용할 것을 바라고 있었는데,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중대단위로 분산시켜 중대기지(中隊基地)를 운용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초기 단계에 있어서 중대기지의 작전개념은, 미군당국은 물론 전투경험이 있는
일부 맹호사단의 대대장과 연대장까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중대기지 개념에 의한 방어 배치와 작전운용은 월남전에서
가장 적절하고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책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맹호사단이 최초 6개월간의 작전을 분석한 결과 나타난 것이다.

첫째, 중대 기지는 전투력의 핵인 중대단위로 방어 편성을 하므로 조직과 편성을
적절하게 안배한다면 어떤 적도 물리칠 수 있다.

둘째, 한국군과 같이 헬리콥터나 차량 등 기동력이 없는 부대가 한 곳에 집결
한다는 것은 어떤 돌발 작전에 신속기동 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의 목표로서의 취약점만 증대시킬 뿐이다.

셋째, 중대단위의 기본조직을 활용하여 월남주민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
심리전이나 대민사업을 편다면 광범위하게 평정사업을 성위 시킬 수 있다.

넷째, 월남에는 뚜렷한 목표가 없다. 따라서 , 말단 중대 단위의 세밀한 정찰과
빈번한 대민접촉으로 첩보를 얻은 뒤 분석한 다음에 목표를 발견할 수 있다.

이상 네 가지 외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략적인 가치는 한국군을 일정지역에 묶어
놓겠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필요 외의 희생 없이 참전의 명분을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미군당국은 항상 이 사실에 불만이 있었다. 그러므로
기회만 포착되면 언제든지 한국군을 진흙탕으로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렸다.

채명신소장은 바로 그들의 내면적인 기도를 알고 있었으므로 얄미울 정도로
이리 빼고 저리 빼면서 한국군을 일정 지역에 고착시키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맹호사단에 제 26 연대가 증파되어 병력이 남아돈다는 것을 안
미군당국이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미군당국은 채소장의 거절이유 중에서 세 가지를 해결하는 방향에서 다시 절충해 왔다.

첫째 조건은, 한국군의 통신장비 개선을 위하여 신형무전기 AN/PRC 25를 한국군에게
보급하겠다는 것이다. 대대에 필요한 27대를 모두 주겠다는 것이다.

둘째 조건은, 보급관계인데 이는 미제 25 보병사단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필요한 전 보급품을 전량 대주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더 이상 버틸 수만도 없게 된 채 소장은,
마침내 미군당국의 제의에 동의하게 되었다.

1966년 7월 6일.

사단으로부터 준비명령을 받은 기갑연대는 출동부대로 제 3 대대를 지정하고
특수임무부대로서 필요한 지원부대를 배속 받았다.
배속 받은 지원부대는 포병61대대 제 3 포대(105mm 곡사포 6문),
포병제628대대 제 3 포대(155mm 곡사포 4문), 4.2인치 박격포 1 개 소대,
사단공병대대 제 1 중대 제 1 소대이다.

특히, 작전명령 상에는
“모든 전술기지는 72시간 재보급 없이 지탱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역시 미군의 작전통제권하에 파견되지만,
중대기지의 작전개념만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채명신소장의 의지가 담겨진 것이다.



제 3 대대장 최병수 중령은 출발 전에 다시 채명신 소장으로부터 직접 구두로
다음 지시사항을 받고 이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첫째, 1 개 중대를 예비로 하고 2개 중대를 지원포병의 사거리 내에서
        서로 증원할 수 있도록 전개하라.
둘째, 중대전술기지는 그 사주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현지 환경의 적응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탐색지역을 확대하라.
셋째, 만약 적이 아군 기지를 공격하면 결전을 감행하라. 이를 위하여 72시간 이상
        지탱할 수 있는 탄약과 식량을 확보하라.

그로부터 3 일 뒤인 7월 9일에 제 3 대대는 행군종대를 4개제대로 편성하고
트럭 187대에 분승, 아침 6시에 출발하여 오후 2시 정각에 목표지역인 둑코 비행장에
진출하였다. 행군거리는 187km이며, 행군장경이 50km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일단 대열을 정돈한 대대는 현지에 포병제628대대 제 3포병대를 남긴 다음,
다시 남쪽으로 7km 전진하여 대대전술지휘소와 대대예비로 지정된 제 9 중대 그리고
포병제 61대대 제 3 포대 및 4.2인치 중박격포소대가 계획된 장소에 집결하였다.
제10중대, 제11중대는 그 남서쪽 3.5km 지점에 각각 중대 기지를 점령하였다.

제3대대에 할당된 책임지역은 캄보디아 국경선과 둑코간의 13km의 폭, 그리고
19번 도로부터 야드랑 강의 지류인 야프논(la Pnon)천 중류까지의 11km의 종심을 가진
정글지대이다. 그 북쪽은 월남의 비정규군 민방위대 1개 중대와 접하고
지경선 남단에는 미제3여단 제35보병 1대대가 전개하고 있었다.
또 둑코 비행장에는 미포병의 8인치 곡사포 및 175mm 평사포 각 2문과
미제69기갑전차 제1중대, 그리고 비정규준 민방위대 1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제3대대장은 현지에 진출하는 즉시 각 중대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지시에 의거,
중대 기지를 구축하도록 하였다.

첫째, 중대 기지는 사주방어 원칙에 의거하여 내곽, 외곽의 이중진지를 준비하되
        중대관측소와 공용화기진지 및 취침 호는 모두 유개호로 만든다.

둘째, 야간조명을 비롯하여 각종 장애물을 설치하고 모든 조기경보수단을 최대로 활용한다.

셋째, 기지 외곽으로부터 150m~400m 떨어진 예상되는 적의 접근로에 지원포병의
        화집점(火集点, 포사격 집중점을 미리 정해 놓음)4개 내지 5개를 설정한다.

대대장의 지시에 따라 각 중대가 중대 기지건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고 있을 때,
첫날부터 미군과 적전개념의 차이로 병력운용 방식에 관하여 의견차이가 나타났다.

각 중대가 중대단위 기지를 준비하기 시작하자,
작전통권자인 제 3 여단장 워커(Walker)준장은 자기에게 배속되었으니
자기의 작전지도 방침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즉 대대의 임무는 작전지역 내의 탐색, 정참, 잠복으로 침투하는 적을 포착
격멸하는 한편 명에 의하여 즉시 출동할 수 있는 태세로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여단장의 작전방침은 책임지대 내의 예상되는 적의 접근로에 4명~5명 단위의
지상감시초소로써 연결된 선을 형성하여 적의 접근을 탐지, 포병 화력으로 이를
격파하거나 예비대를 투입할 때까지 접촉을 유지하게 하는 기동타격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그 시점에서 장비 및 화력이 못 미치고 전기(戰技) 또한 그 방식에
적응하려면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맹호사단장이 현지의 작전통제권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지시도 외면할 수 없는 딱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대대장은 여단장에게 일정한 시간을 요구하고 나서는 한편, 맹호사단장이 지시한
비축용 3일분의 식량과 탄약 등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단장은 자기의 지도복안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라고 거듭 강조할 뿐만 아니라
수시로 전장에 공중기동하게 될 것이므로 미군의 보급수준 만큼 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대대는 105mm 곡사포탄 2700발과 155mm 곡사포탄 1500발을 청구하였지만,
미제3여단에서는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800발선을 고집하면서
비상시에는 언제든지 책임지고 2시간 이내에 재보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대대장은 이러한 내용을 연대를 경유하여 사단에 보고하였더니, 사단으로부터
“사단전술개념을 근간으로 임무를 수행하되 작전권자와 충분히 협조하라.”는 회신이 왔다.

따라서 대대장은 우선 중대단위 전술기지를 준비하게 한 연후에 여단장의 방침에 따라
전투에 임하기로 작정하고, 각 중대 및 포대장들에게 72시간의 식량과 탄약을
비축하도록 지시하였다. 매우 어려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맹호사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도 없고 미제3여단장의 지시를
따를 수도 없는 묘한 입장이 된 것이다.그러나 대대장은 양축의 뜻을 적절히 따르는
길을 찾는데 골몰하였다. 대대는 탐색지대를 차츰 확대하면서 매일 각 중대 단위로
2개 소대 규모의 수색정찰과 야간잠복소를 설치 운용하였다.

1966년 8월 9일 제9중대의 통칭 ‘둑코전투’가 벌어지기까지 30일 동안
수색정찰 147회, 잠복 385회를 실시하여 한국군과 미군 양쪽 상관의 지시를
골고루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기간 중 변동사항으로는 7월 10일에 미제69전차대대 제 1중대 제1소대가 대대에
배속되었고, 7월 27일에는 제9중대와 제 11중대의 임무를 교대시켰다.
제9중대의 중대 기지는 대대전술지휘소가 위치한 곳에서 남서쪽으로 3.5km 떨어진,
등고선 표고 200m의 경사도가 완만한 구릉지대에 설치되었다.

기지의 사주가 정글에 덮여있고, 그 서쪽 600m에 이아클(Ia Cle)천이 남쪽으로 흐르며
여기서부터 한 가닥의 소로가 있다.
처음에 이 기지 지역은 미군이 잠시 동안 야영한 적이 있었는데,
제11중대가 이 장소를 개척하여 동서200m, 남북100m 규모의 진지를 구축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7월 27일 제9중대가 인수한 것이다.

이 일대의 토질은 황토로서 예상 외로 단단하여 굴토작업이 어려웠던 반면
그만큼 진지는 견고하였다. 또 기지 서쪽 200m~300m 간에는 수목이 없고 평탄하며
진지 외곽선으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 한 그루의 나무가 우뚝 선 반면,
남쪽일대에는 외선(外線)과 정글 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지표면의 굴곡이 많아
직사화기의 사각(死角)을 이루고 있으므로 적의 접근 우선순위가 높은 곳이었다.

제9중대장 이춘근(李春根)대위는 임무교대의 준비명령을 받자,
7월 25일에 제 2소대를 선발대로 미리 보내어 진지를 보강케 하고,
지형에 익숙하도록 조치하였다.

중대의 도착이 완료되자 지형이 좋지 않는 제 2소대에 중화기중대의 제 1소대(-)를
배속하여 기지 남서 일각부터 북서쪽 일부까지의 서반부를 책임지게 하였으며,
미군으로부터 배속 받은 전차 5대 중 3대를 이쪽에 증강토록 하였다.
또 오른쪽에는 제 3소대로 하여금 북쪽과 북동쪽 일각을 담당케하고,
남동과 남쪽 일각에 제1소대 및 전차 2대를 배치하였다.

한편 내곽선에는 중대관측소와 60mm 및 81mm 박격포 3문을 방열케 하였으며,
외곽선으로부터 300m ~ 400m 떨어진 사각지대 등 적이 숨기 좋은 곳에
화집점 4개소를 선정해 놓았다.

이밖에도 중대장은 조명지뢰 100발을, 외곽선 밖 200m ~ 400m 떨어진
적의 예상접근로 및 예상 집결지에 설치함으로써 조기경보장치를 보강했다.

8월 5일 밤 10시, 제2소대 정면 400m 지점에 설치한 조명지뢰가 터지면서
청음초로부터 수 미상의 적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포화를 퍼부었다.
날이 밝은 다음 현장일대를 탐색하였더니, 베트민군의 폭사한 시체 4구가 뒹굴고
권총 1정을 포함한 잡다한 개인장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한편 대대전술지휘소에는 여단장이 순시차 도착하여 대대장에게 최근의 적정과
전황을 알려주었다. 다음, 소재는 불명하나 국경선 부근에 단대호 미상의
베트민군 지회소가 새로 등장한 기미가 보이니 1개 중대 규모로 2박 3일간에 걸쳐
용의지대를 수색 정찰하라고 지시하였다.

대대장은 곧 제 9중대장에게 이 임무를 맡기고, 정찰기간에 대대예비대인 제11중대에서
1개 소대를 뽑아 제 9중대 기지를 경계하도록 조치하였다.
정찰임무를 부여받은 제9중대장 이춘근 대위는 정찰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다음날인 7일에 강세호(姜世虎)대위가 신임중대장으로,
또 임복만(林福萬)중위가 화기 소대장으로써 중대에 부임하였다. 신구임 중대장은
이날부터 일주일간 합동 근무한 연후에 지휘권을 인수인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제9중대장 이춘근대위는 제11중대의 1개소대와 중화기중대에서 배속된
2개대(-) 및 미전차 1개 소대에게 기지방어를 밭기고, 다음날 8일 이른 아침에
국경선을 목표로 정찰에 나섰다.

얼마 후, 중대장은 정글 속의 작은 길목 마다 적이 활동했던 흔적과 여러가지 표지가
있는 것을 보고 소로를 피하며 새 진로를 개척하면서 오후 5시에 목표인 국경선
동쪽 1km지점에 도착하였다. 이 정찰에는 전날 부임한 신임중대장 강대위도 동행하였다.
중대는 목표지역 일대의 수색정찰을 마치고 야간잠복조를 배치하여 야간경계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비를 맞으며 한밤을 지새운 중대는 다음날 새벽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곧 정찰을 개재하여 접적 없이 임무를 마치고 오후 3시에 중대기지로 복귀하였다.
중대장은 즉시 비에 젖은 장비를 손질시키는 한편
제11중대 제1소대를 원대에 되돌려 보냈다.

대대장은 이날 밤도 2개 소대 규모의 야간잠복대를 기지전방에 산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중대장 이춘근대위는 이틀간 비를 맞으며 정글 속을 누비고 수색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중대원에게, 휴식도 없이 잠복을 강행시킨다면 오히려 경계의 허점이
드러나기 쉽다고 판단하고 멋대로 이를 이행하지 않다.

이날 밤에는 오랜만에 비가 멎고 구름 사이로 간혹 별들이 반짝이기도 하였다.

중대 장교들은 초저녁에 모두 관측소에 모여 2일전에 부임한 강대위와 임중위를
환영하는 조촐한 모임을 갖고, 파월한국군으로서는 처음 국경선을 정찰한
장한 발걸음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얼마 뒤 장교들은 각자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관측장교 한광덕(韓洸德)중위는 관측반 쪽으로 갔다.
원래 그는 직책상 중대장과 같은 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신임 중대장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잠자리에 누운 신구임 두 중대장은 그때 비로소 그들의 출생지가 같은 고향인
함경남도라는 것을 알고, 그 동안 겪은 세파의 희비애락을 주고받느라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밤 10시 40분.

“쾅~!”

이때 제2소대 독립수 근처에서 조명지뢰 1발이 터졌다.

별로 큰 소리는 아니지만 적막한 밤의 공기를 흔들기에는 충분하였다.
곧 주위일대가 밝아졌다.
중대장은 제2소대장에게 확인한 바,
그 부근의 경계병이 의심스러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해왔다.
또 그 옆에 배치된 미군의 전차병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왔다.

‘바람에 걸려 잘못 폭발됐겠지.’

이렇게 생각한 중대장은 마음 놓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5분도 채 못 되어 외곽선을 순찰하던 신임화기소대장
임복만 중위가 헐떡이며 중대장에게 달려왔다.

“중대장님! 제2소대 전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중대장은 임중위가 처음 부임해 온 만큼 신경이 과민하여 서두르는 것이라고 직감하면서
 
“알았다.”

고 간단히 대답한 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때 중대장은 적이 제2소대로 접근한다는 것은 정면이므로,
전술상의 상식으로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며 비상배치를 하지 않았다.

이에 임중위가 다시 현장에 달려가 보니
57mm 무반동총 부사수 박창규(朴昌圭) 병장이 또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발자국 소리를 분명히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므로 즉시 중대본부로 다시 뛰어갔다.
중대장은 귀찮다는 듯이 그를 맞았다.

“뭐야?”

중대장은 전투경험도 없는 주제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냐는 표정이었다.

“중대장님! 분명히 적의 발자국 소리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사병들도 확인하였습니다.”

중대장은 그때서야 약간 관심을 표명하더니

“알았다. 미군에게 말하여 전차의 탐조등을 비추게 해라.”

고 지시할 뿐, 그때도 중대원들에게 비상발령을 취하지 않고
다음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임중위가 제2소대 진지 일각에 위치한 전차근방에 이르렀을 때,
최병기(崔炳基)상병이 조심스럽게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립니다.”

라고 급히 말했다.
임중위는 심상치 않다고 직감하고 즉시 미군 전차병에게 용의 장소를 지적한 다음
탐조등으로 비추다가 수상한 것이 보이면 그대로 사격하라고 지시하였다.
곧이어 미군은 전차의 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부릉- 부릉- 부릉-”

시동소리가 요란하게 한밤중의 정숙(靜肅)을 깨뜨렸다.
이때, 적의 기관총이 먼저 불을 뿜었다.

“따따따따~ 따따따따~”

느닷없는 기관총성에 놀란 중대원들은 허둥대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밤 11시 3분 전이었다.

사격소리에 놀란 신구임 중대장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적의 공격준비 사격이 기지 내에 집중되었다.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지축을 흔들면서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초연과 흙먼지가 진내를 꽉 메웠다.
 
“쎙쎙, 쾅쾅!”

열풍과 파편이 소리 내어 난무하면서 기지 내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중대 병력의 절반은 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그 난리 통에 총과 실탄을 찾는 혼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습을 당했을망정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던 일부 병력은 비교적 빨리
자기 정위치에 배치되어 전방의 적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포탄은 사정없이 떨어졌다.

“쾅 쾅 쾅 쾅!”

포탄의 직격탄에 맞아 아무소리 못하고 숨져 가는가 하면 파편에 맞아 신음하는
비참한 소리가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중대장 이춘근대위는 지원포병의 화력을 요청하려고 황급히 관측소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섬광이 번쩍하면서 폭풍에 밀려 교통호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뒤를 다르던 신임중대장 강세호(姜世虎)대위도 파편을 맞고 쓰러졌으며,
전령 천종록(千種錄)상병의 좌측 어깨에서도 선혈이 낭자했다.

잠시 뒤, 중대장 이대위는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만져보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는 즉시 관측소에 뛰어 들어 무전기를 움켜쥐고 대대를 호출하였다.
뒤를 이어 제1소대장 고귀영(高貴永)중위ㅡ 제2소대장 이춘식(李春植)중위가
부상당했다고 보고해왔다.

포탄은 사정없이 계속 떨어졌다.

“쾅 쾅 쾅 쾅!”

작렬하는 포탄에 맞아 피를 쏟으며 아우성치는 처절한 광경이 계속되어,
불과 5분 동안에 기지 내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때 장갑차 속에 들어가 있어서 포탄의 영향을 안 받던
미군의 전차병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적을 향하여 직격탄을 마구 퍼부었다.

“슛-쾅, 슛-쾅!”

빨간 섬광을 전차 뒤로 내뿜으며 무시무시한 화력이 전방에 집중되었다.

한편, 관측장교 한광덕중위는 포탄소리에 즉시 잠자리에서 나와 중대장에게로
달려가는데 그와 신임중대장 강대위 사이에 터진 일탄에 뒤로 뒹굴고 말았다.

온 전신이 화끈한 순간,
중대장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관측소 안으로 미친 듯이 들어갔다.
이때 그의 뒤를 따르던 무전병 김진선(金振善)병장은, 그를 앞선 4.2인치 박격포 소대의
추진관측수 최영의(崔英義) 상병이 부상당한 것을 보고 주춤하는 사이에
연이어 폭발하는 포탄으로 호 밖에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관측하사관 박재영(朴在英)하사가 재빨리 무전기를 들고
제2소대 정면의 화집점에 사격임무를 통보하였다. 박하사의 기민한 조치는
한중위가 관측소까지 이르는 공백 기간을 상쇄한 것이다.

이어서 한중위가 무전기로 사격지휘본부(FDC)에 가격요청을 시작한 직후
아군 포화의 제1탄이 적의 공격대열 한 복판에 작렬하였다.
그러니까, 이는 박하사가 사격을 요청한지 3분 만에 날아든 것으로
그때 한중위의 손목시계는 밤 11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실로 이 한 발의 열탄은 적의 예봉(銳鋒)을 꺾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중위는 지체 없이 포대 10발(6문이 포대인바 60발)의 효력사를 요청한 다음
각 소대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이때 적이 포탄 한 발이 관측소 지붕 위에 떨어져
고막을 찢는 듯 한 파열음이 진동하더니 하늘이 보이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근방 일대는 섬광이 계속 번쩍이면서 흙덩어리가 “우르륵!” 쏟아져 내렸다.

잠시 후 쓰러졌던 본부요원들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각자 부서에서 상황을 처리하였다.
그런데 중대장 이대위가 제3소대 정면에도 적이 접근 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포병으로 하여금 그쪽 화집점에 포화를 집중케하는 동시에 그들의 주력이 지향된
것으로 판단되는 제2소대의 화집점 근방에 적의 증원병력 차단사격을 퍼붓게 하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아군의 4.2인치 박격포를 비롯한 곡사포의 조명탄이 간단없이 기지
일대를 밝히고, 직사화기의 사각지대에는 진내의 박격포탄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의 박격포가격은 상황이 개시된 지 10분간에 가장 치열하였는데,
이 동안에 무려 170여 발이 집중폭발하고 전 사상자의 90%가 이때에 발생하였다.

적과 아군 간에는 맹렬한 사격이 교환되었다.
미군의 전차포를 비롯하여 기지 내의 모든 직사화기가 불을 뿜었으며,
적 또한 직사포탄과 아울러 기관총사격을 맹렬하게 가해왔다.

“쾅 쾅 쾅 쾅!”

“따따따, 따따따따따.....”

“따따따, 따따......”

끝없는 작렬음과 금속음이 이어지고, 대낮같이 밝은 조명탄에 물들여진 하늘은
전장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실현시키고 있는 형국이었다.

적은 차츰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대치하고 있는 적이 기지를 사주에서 포위하고
차츰 그들이 포위망을 좁히고 있음을 알아차린 중대장 이대위는
호 밖에 뛰어나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절규하였다.

“싸울 수 있는 모든 중대원은 모두 나서라. 그리고 진지를 사수한다!
중대장 이하 모두 육박전을 감행한다.”

중대장의 울부짖음이 폭음 사이사이에 울려 퍼지자,
중대원은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착검한 후 수류탄을 챙겼다.
모두 한결 같이 비장한 결의가 추상같이 서려 있었다.
이리하여, 상체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부상병까지 모두 외곽선진지에 산개하여
피에 젖은 총대를 움켜쥐고 달려드는 적에게 사격을 계속하였다.

이때에 관측반의 무전병이 포화를 뚫고 관측소 안에 굴러 들어오므로,
중대장은 비로소 자기 무전기를 받아 쥐고 대대장 최병수 중령에게 위급상황을 상세히
보고하였으며 이어서 화기소대장에게 제1소대장의 지휘를 겸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얼마 뒤,
그러니까 적의 공격이 시작된 지 40분이 경과할 무렵,
화집점에 155mm 곡사포탄이 집중 작렬하자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그들의 박격포 사격이 수그러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육박하던 적들도 주춤하면서 잠시 대열을 정돈하는 듯
충격행동을 멈추는 것이었다.

중대는 이리하여 가장 위급한 고비는 전차포와 포병화력 적분으로 넘긴 셈인데,
이를 위하여 특히 기지 내의 미군전차병들의 필사적인 감투 정신은 한국군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또한 지원포병의 신속하고 정확한 포격과 이를 운용 조정하는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의
무서운 책임감은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무렵,
대대는 지휘소 겸 포대군(砲隊群) 사격지휘본부로 벙커 1개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날 밤 적정과 인접부대 상황을 종합 분석한 다음 당직근무자를 제외한 참모들이
가면호(假眠壕)에 들어간 직후, 갑자기 제 9중대기지 쪽에서 섬광이 번뜩이더니
둔탁한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지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이때, 지휘망을 통하여 화집점 AB311에 포대 10발의 사격 요청이 있었으나
무전기에 울리는 관측장교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사격요청이 있은 지 2분 후인 밤 11시 3분에 김진규(金振奎)대위가 지휘하는
포병 제61대대 제3포대의 첫 1발이 발사되었다.

대대장 최병수 중령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제9중대의 소대, 중대간의
무선망 주파수에 맞추어 교신내용을 방청하였다. 그리하여 전황을 추리한 바
제9중대를 공격하고 있는 적의 세력이 만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황이 화급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욱이, 신임중대장과 제1및 제2소대장을 비롯한 적지 않은 병력이 부상하였다는
내용을 접할 때마다 벙커 내에는 침통한 분위기에 싸였다.
먼동이 틀 때까지 6시간 동안 포화의 지원 없이 제9중대가 적의 파상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은 뻔 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포대군을 통합지휘하고 있는 포대장 김진규 대위는
4.2인치 중박격포를 비롯한 지원포병에서 조명탄을 발사하도록 하고
대대에 파견된 미항공연락장교에세 항공조명을 요청하게 하였다.
곧이어 둑코 비행장에 포진한 미군의 8인치 및 175mm포로써
예상되는 적의 증원을 차단케 하는 한편, 포대군의 포탄 재고량을 확인하였던바
105mm 960발, 155mm 600발이 있었다.

이에 대대는 인접한 미제9포병 제2대대 B 포대 (155mm 곡사포)의 화력 지원을 요청,
이를 활용하는 한편 대대장은 여단장에게 포탄의 긴급 추진보급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단에서는 날이 밝기 전에는 재보급이 곤란하다고 말했다.
날이 밝지 않으면 재보급을 할 수 없다는 말이리라.

새벽 1시 30분에 적의 병력이 증강된 1개 대대 규모로 윤곽이 드러나자
대대장은 제10중대로 교전지의 남쪽을, 그리고 제11중대로써 그 북동쪽을
각각 차단케 하여 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적의 제1파 공격이 끝난 얼마 후 제2파가 육박하여 왔다.
여기에 산개한 전차 2대의 기관포 2문과 경기관총 2정 그리고
중화기중대의 경기관총 4정 및 자동소총 2정이 최저 표적사격으로 화망을 구성하고,
부상병까지 똘똘 뭉쳐 한 덩어리가 된 대원들이 총격을 가하는 광경은
처절하기 보다는 차라리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적을 한발자국도 더 들여놓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이와 같은 철통방어를 뚫으려는 적은,
앞줄이 쓰러지면 뒤따라 전진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호를 파는 미련스러운 행동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들도 필사적인 독전(督戰)을 받고 있는 것 같았으나
끝내 진 앞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는 적의 주력이 접근 중인 화집점 AB311일대에
105mm 포대 4~5발이 떨어진 뒤로부터 사격 수정을 하고,
155mm 포대로 그 후방에 대한 차단 포격을 가하도록 요청하였다.
곧 이어 제3소대로부터 북서쪽 독립수 근방에서 그들이 자동화기사격을 가한다는
보고에 접했는데, 이는 적이 양익포위를 시도하려는 징후로 판단되었다.

이에 그들의 포위를 위한 우회로의 제압이 시급함을 직감하고,
155mm 포로 기지 북서쪽 400m 떨어진 산 일대에 포대 2발을 요청한데 이어,
105mm 포의 표적을 동쪽 150m 로 옮겨 포대 3발을 때리게 하였다.
뒤이어 제2소대 정면의 바나나 숲으로부터 총탄이 집중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는 즉시,
105mm 포로 화집점 AB311 서쪽 포대 3발을 집중케 하였다.

잠시 후에 미군의 155mm 포대도 직접 조정하라는 명령과 함께 8인치와
175mm 포로 예상되는 적의 증원 및 퇴로차단 사격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리하여 한광덕 중위는 3개포대를 동시에 조정해야 하는 벅찬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에 더하여 8인치 및 175mm의 거탄이 기지 근방에서 작렬하는 굉음으로
말미암아 낙탄 수정이 곤란하였다.

이때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하여 3개 포대의 포격을 일단 중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우선 155mm 포로 제2소대 정면의 정글을 때리게 하고,
이어 미군의 155mm 포로 북쪽 바깥선 150m까지 근접사격을 유도한 다음
효력사(效力射)를 퍼붓게 하였다.

이어 한중위가 가장 자신 있게 화력을 조정할 수 있는 105mm 포로
화집점 AB311을 중심으로 한 개활지 일대에 포대 1~2발씩을 집중시키면서
기지 바깥선의 바로 전방까지 지근사격을 퍼붓게 하였다.

이 무렵, 항공조명을 유도하는 한중위의 목소리는 벌써 쉬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아직도 산발적인 적의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사이를 누비며
바삐 뛰어다니는 미군병사가 있었다.
그는 위스콘(Wiscon)이라고 하는 전차소대의 위생병으로 독실한 천주고 신자이다.
한 손에는 구급낭을, 또 한 손에는 십자가를 받쳐 들고,

“다친 사람 없습니까? 다친 사람요!”

하고 외치면서 자기가 확인한 전사자는 5명이라고 알려 준 다음
총격에도 아랑곳없이 제3소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우방의 전우들에게는 한결같이 그가 성스러워
보였으리라.

무기도 지니지 않고 구급낭과 십자가만을 방패삼아
전장을 누비는 그의 입에서는 절규하듯,

“오, 천주님! 오, 천주님!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히 여기소서.
다치는 자나 죽는 자가 없게 하소서.“

라고 기구하며 뛰고 있었으리라.

이때 북쪽 제3소대 진지 앞 정글을 포격하던 미제9포병 제2대대 B포대가 발사한
포탄 한 발이 아군 진내 81mm 탄약고 옆에 떨어져 한중위와 화기소대장은
폭풍(爆風)에 날려 넘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고 한중위는 즉각 동포대의 포격을 중단시켰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적은 다시 제3파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격파되었다.
자정이 넘은 30분경에는 그들의 박격포도 멎고 직사화기만 집중하였다.
이윽고, 새벽 2시에는 총격빈도가 줄어들더니 30분 후에는 철수하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자, 중대장은 적이 주공방향을 바꿀 공산이 있음을 감안하여
각 소대로 하여금 경계를 강화하고 적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도록 하였다.

또한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는 퇴로차단 포격을 요청하여,
제9중대 기지를 중심으로 한 지근거리 사격으로부터 원거리 포격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사격빈도를 늦추었다.

그런데 새벽 4시가 되자 제2소대 진지 앞으로 수 미상의 일단이 수류탄을 던지며
달려들었고 일부는 철조망 선에 달라붙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발악이었다.
이에 중대는 총격과 탄막으로 격퇴시키고 철조망에 엎드린 5명은 맨손으로
격투 끝에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은 주력이 안전지대로 나갈 때까지 아군을 견제하면서
추격이 있을 때는 저격으로 맞서려는 심산인 듯하였다.
이를 꿰뚫어 본 중대장은 적정도 모호하고 야간이었으므로 자중하며
우발사태에 대비하면서 지원부대가 진출하기를 기다렸다.

이 무렵, 제10중대장 양재일 대위와 제11중대장 이인수(李寅秀)대위는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목표를 향해 진출하고 있었다.

한편 전투개시 벽두에 부상한 신임 중대장 강세호 대위는,
중대장 벙커에서 연락병을 통해 전황을 보고 받다가 제1판 공격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안도의 미소를 머금더니 곧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4시간 후, 전황이 역전되어 승리가 완연한 새벽 4시에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침 옆에 있던 관측장교 한중위에게

“나 먼저 가네, 꼭 이겨야 하네! 부, 부탁이야...”

하며 비록 힘없는 목소리였으나 또렷한 음성으로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강대위는 함경남도 함흥 태생으로 한국전쟁 때인 1.4후퇴 당시 월남하여
사병으로 종군하다가 갑종간부 67기로 1953년 11월 28일에 임관한,
남달리 충성심이 강한 장교였다.
그는 1966년 4월에 33세의 노총각으로 결혼하여 결혼 3개월 만에 파월을 지원하고,
8월 7일에 중대장으로 부임한 지 4일째로 지휘권도 인수받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늘도 무심타고 하는 것일까?

한편 화기소대장 임복만 중위가 진지를 순찰할 무렵,
제2소대에서는 선임하사 이종세(李鍾世) 중사가 외선을 돌면서 장애물과
경계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 호를 파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들은 대원들이 긴장 속에 전투태세를
가다듬고 있었으며, 소대병력의 2분의 1은 가면(假眠)중이었다.
곧이어 소대에 배치된 전차의 탐조등이 비치고 적의 박격포판이 진내에 작렬하자,
제2소대장 이춘식(李春植)중위를 필두로 가면 중이던 대원들이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

이때 적이 중대본부를 첫 번째 표적으로 집중포격을 한 까닭에
소대지역에는 낙탄이 뜸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소대는 급히 산개하였으며
여기에 그들의 주공이 지향된 것이다.

한편, 소대에 배속된 중화기 중대의 제1소대는 국경선 정찰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원이 외곽선 진지에 산개하고 있었으므로 적의 제1파가 엄습하기 이전에
이미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무렵, 외선일각의 전차 옆에 있던 송창석(宋昌錫)상병과 같은 호에서 경계하던
미군 전차병 네론(Neron)상병 모두가 머리에 파편을 맞아 선혈이 낭자하게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몰려드는 적을 막아내느라 그런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소대장 이춘식 중위는 오른쪽 어깨에 파편을 맞고 쓰려졌으며
때를 같이 하여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그들의 주공정면인 소대 쪽으로 포격방향을 옮긴 것이다.

이때 선임하사관 이종세 중사는 소대장이 부상하자, 즉각 사격을 통제하고
좌일선의 제1및 제3분대를 소대향도에게 맡긴 후 나머지 병력을 직접 지휘하였다.

“소대는 동요하지 말고 내 명령에 따르라!
모두 착검하라, 적이 가까이 오면 수류탄으로 명중시켜라!“

하며 교통호를 누비고 다니면서 중대장이 명령한 육박전에 대비하였다.

한편, 소대에 배속된 중화기중대의 경기관총 제1소대는 며칠 전에 소대장이 말라리아로
후송되었기 때문에 선임하사관 이대일(李大日)중사가 소대장직을 대행하고 있었다.

이무렵 적의 선봉이 제2소대 정면에 시시각각으로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지만,
이종세 중사는 야멸차게 총격을 보류하고 있다가
적의 선두가 제2분대 진 앞에 이르렀을 때

“발사!”

하고 명령을 내렸다.

“따따따따...... 타탕 탕 탕......”

“슛, 퍽 퍽!”

소대원의 속사와 기관총 4정이 십자화망을 이루면서 최저표적사격에
최대발사속도로 최후저지사격을 퍼부었다.



실로 운명의 순간이었다.
돌파 당하느냐, 물리치느냐의 갈림길에서 이중사는 대담무쌍하고
냉철한 판단으로 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제2분대 진 앞 30m까지 기어든 적은,
이와 같은 호된 총격을 받자 고개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발악하다가 쓰러져 갔다.
여기에 겹쳐 아군의 포화가 그들의 대열에 작렬하자,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 적은 진퇴유곡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쓰러져 갔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호를 파고 저항하다가 물러가고 말았다.

이렇게 전사자 1명 없이 적의 예기를 분쇄한 소대는,
지원포화가 적을 제압하는 동안 탄약 재분배와 공용화기 진지를 전환시키는 한편
부상자를 돌보며 전투대열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소대는 이러한 혈투를 5차례나 치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며,
총격과 수류탄으로 적을 한발자국도 진내에 들여놓지 않고 격퇴하였던 것이다.

이때 경기관총과 자동소총은 조명탄이 명멸하는 막간을 이용하여 화망(火網)을 구성하고,
각개 병사는 조준사격으로 ‘1탄1적(一彈一適)’의 정신으로 총탄을 아꼈다.
그리고 분대장과 선임하사관 이중사는, 적정을 살펴 지원화력을 요청하면서
탄착점의 수정제원을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에게 보고하였다.

일사불란!
바로 이말 이외에 더 적확(的確)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 대원의 사기와 주도면밀하고 순발력 있는
지휘능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전투 간에 대원은 한결같이 생사를 초월하여 진지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뭉쳐
혼연일체로 싸우고 또 싸웠던 것이다.
특히 제2소대의 이종세 중사와 경기관총 제1소대의 이대일 중사 및 분대장
정현옥(鄭鉉玉) 병장 그리고 경기관총 부사수 박오택(朴五澤)상병의 활약이 눈부셨으며,
공격을 물리칠 때는 박오택 상병이 진 밖으로 뛰쳐나가 철조망 선에 달라붙은
적병 5명을 단신으로 비호같이 덮쳐 찌르고 베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날쌘 동작으로 5시간에 걸친 혈전의 마지막을 장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경기관총 제1소대의 서재석(徐在錫), 임태영(林泰英) 두 병장과
조봉환(曺奉煥) 상병이 분투하다가 흉탄을 맞고 선혈을 뿌리며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한편, 이종세 중사는 이때의 전공으로 살아서는 받을 수 없다는 태극무공훈장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수여받았다.
이로써 이 전투에서의 그의 감투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제2소대의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기지 북쪽 일각까지를 담당한
정희율(鄭熙律)소위의 제3소대는, 적의 공격 준비사격이 시작될 때 그 일부가
소대지역에 집중 작렬된 탓으로 적지 않은 전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이때, 경기관총 탄약수 최영환(崔永煥)상병이 이 전투에서 최초로 허리에 파편상을 입고
부상하였다. 뒤이어 진지로 향하던 대원들도 부상을 당하였지만 위생병의 가료를 받을
여우도 없이 교전에 몰리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였으므로 화기분대장 김지욱(金知郁)하사는 왼손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탄약을 분배하며 대원들을 격려하였다.
또한 제1분대장 심삼덕(沈三德)하사는 얼굴 하반부에 파편이 박히자 즉시
압박붕대로 동여맸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으므로
다시 대검으로 입술 부분의 맨살을 찢은 다음 교통호를 누비면서
대원들을 독려하고 다니는 눈물겨운 정경도 있었다.

그러나 이돌선(李乭先)병장과 김길일(金吉一), 김명수(金明洙)일병은
지근탄에 맞아 적혈을 뿌리며 전사하였다.

이 무렵 고건영(高建永)중위의 제1소대 책임구역에서는, 적의 총격행동이 없었으나
적의 포격으로 소대장 고중위가 부상한 까닭에 소대의 전개가 늦어졌다.

한편 화기소대장 임복만 중위가 강세호 대위의 가료를 둘러 본 다음
60mm 박격포 진진에 달려가지, 선임하사관 김태준(金泰俊)중사가 포격준비를 마치고
적의 포격이 멈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중대장 이춘근 대위로부터
지휘를 겸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쪽으로 달려가서 뒤숭숭한 소대를 정돈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이리하여 임중위는 적의 파상공격의 틈을 이용하여 경기관총 1정은
중화기중대 제1소대 진지에 증원하고, 공용화기의 진지전환과 박격포의 탄막 및 조명
그리고 제1소대의 전투지회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이때 중대에 배속된 중화기중대 제3소대(-)의 81mm 박격포 3문에서는
적의 포탄 1발이 제3번 포상(砲床)에 떨어져 사수 이운산(李雲山), 부사수
강길량(姜吉兩) 두 상병이 함께 부상을 입어 제3번포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소대는 제5번포로 조명탄을, 제6번포로 고폭탄을 쏘게 하였는데
제5번 포사수 김정래(金正來), 부사수 김창환(金昌煥) 두 병장은 왼팔과 머리에
파편을 맞고도 포격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적의 제1파를 격퇴한 다음부터 포병과 항공조명의 공백을
박격포의 조명으로 메우면서 주로 제2소대의 탄막을 형성하였다.
중대장 이춘근 대위는 새벽 5시 30분에 이인수 대위가 지휘하는 제11중대가
기지 북쪽에 진출하자, 배속된 미전차 2대를 진 밖으로 출동시켜
제11중대의 작전소탕을 지원하는 한편 부상자를 수용하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잠시 후에 동이 트자 전투 간에 드물게 개었던 날씨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머지로 뒤덮이고 탄흔으로 얼룩진 격전지에
진혼곡(鎭魂曲)을 울리듯이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날 밤 11시 1분에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로부터
화집점 AB311에 포대 10발의 사격요청을 받은 제3포대장 김진규 대위는
곧 사격제원을 전포대에 하달하자 금방 첫발이 발사되었다.
이는 각 포의 분대장들이 총소리를 듣자 곧바로 약속이나 한 듯이
사격준비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제9중대 쪽으로 포신을 돌려
포탄을 장전하고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대원들의 지원태세가
교전부대의 급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전포대장 김경호(金京鎬)중위는 일제사(一齊射)를 한 다음에
사격속도를 높일 수 있는 각개사(各個射)를 시키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화집점 AB311이 제9중대기지 외선으로부터 3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지근탄을 염려하여 한발 한발 정확하게 사격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이에 소대장은 그러한 전포대장의 심중을 헤아리기는 하였으나 1초가 다급한
교전장의 상황을 감안한 끝에 각개사로 사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포대장은 이 지시에 미소로 응답하는 즉시 “각개사!”하고 명령하였다.

10발을 사격한 무렵,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는 또다시 동 화집점 우측 100m에
포대 10발을 요청하는 것이었다.그러자 김진규 대위는 1개 포대만으로는
사격요구를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즉시 포병제 628대대의 김근식(金根植)
대위가 지휘하는 제3포대 연락장교 김규성(金圭成) 대위에게 화집점
AB312, 305, 301에 포대 3발씩을 차례로 때리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1분 뒤에는 둑코 비행장의 방열된 포대에서 첫발이 날아 왔다.

한편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는 한마디의 상황보고를 할 틈도 없는 듯 연이어
보병지휘망으로 사격임무만 요청하자, 대대작전장교 한근모(韓根模)대위가
답답하다는 듯이 포병사격지휘망을 쓰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한중위는 짤막하게 한마디로 ‘할 수 없다.’ 고 대답하고는
곧이어 다음 사격임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대대장 최병수 중령과 한근모 대위 및 김규성 대위는
교전현장의 상황이 황급하다는 것을 헤아리고, 우선 포화로 바쁜 불을 끌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자 상황보고를 독촉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때 제10중대와 제11중대에 별다른 상황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적이 이춘근 대위의 제9중대만 노리고 있다고 심증을 굳힌 제3포대장 김진규 대위는
미군포병 연락장교에게 8인치와 175mm 포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5분 후에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 4.2인치 중박격포로 조명을 전담케 하다가,
155mm 포로 지원하고 곧이어 항공조명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러는 사이 제9중대장 이춘근 대위로부터 최초의 상황보고가 있어
제3포대장 김진규 대위는 한숨을 돌리고 포탄의 재고를 확인한 다음,
화력의 중단 없는 지원을 위하여 미제9포병 제2대대 B포대를 호출하여
155mm 곡사포의 화력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한광덕 중위로부터 이윽고 적의 박격포사격이 멎었다는 보고를 받고,
이때부터 차분한 마음으로 교전중대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예상되는 퇴로에도
차단포격을 가하였다.

한편, 포병 제628대대의 김근식 대위가 지휘하는 제3포대는
9일 밤 경계상태를 확인한 다음 포대사격지휘본부에 들렀을 때

“제9중대 기징 적이 박격포로 포격 중!”

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곧이어 최초의 사격임무로 화집점 AB311 부근에 포대 3발과 뒤이어
BA305, 312, 302로 옮기며 포탄을 작렬시켰다.
그러나 포대장 김근식 대위는 화집점이 제9중대 기지에 가깝게 설정된 것을 감안하여
요구된 사격제원에 +200으로 첫발을 때리고 수정사격에서는 +50으로 줄여서
효과사를 퍼부었다.




이러한 포격이 시작된 지 한참 뒤에
포대장 김대위는 여단 전방사격지휘본부의
대박격포 레이더반의 AN/MDQ-4를 제9중대 기지로 지향케 하고
8인치 및 175mm 포의 화력증원을 건의하였다.

이무렵 전포대장(戰砲隊長)은 캄보디아 국경 부근의 19번 도로 일대에
교란포격을 가하고있던 포 2문의 가신(架身)도 제9중대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포대군 사격지휘본부의 조정을 따라 포 1문으로 조명탄을,
나머지 3문으로 포격을 계속하였다.

한편 미군의 8인치 및 175mm 포의 화력을 조정한 바,
자정까지는 최대발사속도로 포격하고 대박격포 레이더에 포착된
적의 박격포 진지에도 포탄 공격을 실시했다.

이러한 사격임무를 새벽 5시 50분까지 수행하게 되자,
조명탄 재고가 25발밖에 남지 않게 되어
그 임무를 미제9포병 제2대대 B포대에 넘겼을 때는 재고가 6발에 불과하였다.

한편, 대대에 배속된 연대 전투지원중대의 4.2중박격포 제1소대장 유명재(兪明在)
중위가 8월 9일에 포의 방열을 끝마친 것은 저녁 7시였다.

이리하여 경계배치를 하고 야전에서 대원들이 고이 잠들고 있을 때,
총소리를 듣고 포격태세를 가다듬고 있으니 대대로부터 지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런데, 만일 제9중대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추진관측수
윤명수(尹明洙)병장과 무전병 최영의(崔英義)사병이 적의 박격포탄으로 복부와
머리에 각각 파편 상을 입었기 때문에 무전교신이 늦어졌던 것이다.

곧 이어 소대는 제1 및 제2포로 조명탄을 쏘았는데 그때가 밤 11시 11분이었다.
그로부터 50분간 2문의 포로 조명탄을, 나머지 2문으로 그 폭탄을 최대발사속도로
쏘아댔다. 그리하여 항공조명이 시작된 자정까지 마지막 1발을 쏘아올리고,
탄도고(彈道高)로 인하여 항공조명에 지장을 주게 되어 포격임무를 보류하였다.

이윽고, 새벽 3시 25분과 5시 10분에는 항공기의 교대로 생기게 된
조명 공간의 틈을 타서 제9중대의 철조망 선까지 침투한 적을 소대 포20발의
효력사를 퍼부어 제압하였다. 다시 포격을 보류하다가 아침 6시 20분에 화집점
AB204에 또 다시 소대 포10발을 퍼부어 남은 적을 격파하고 포격임무를 끝마쳤다.

이때 양재일 대위가 지휘하는 제10중대는 새벽 2시 30분에
교전지역 남서쪽으로 나아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중대는 새벽 3시에 기지를 출발하여 1시간 뒤에 야프논(Ia Pnon)강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물이 범람하고 물살이 세어 건너기가 어려웠으므로 강줄기를 따라
진격하다가 얕은 곳에서 도섭하겠다는 뜻을 대대장에게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리하여 아침 5시에 제9중대기지 남서쪽 1.5km 일대의 계곡천 발원지 부근에 이르러
산개하였다. 중대가 산개하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제2소대 제1분대의 김덕수(金德洙),
김영배(金永培) 두 상병은 소대 우측방을 경계하던 중 개울을 건너는 1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60mm 박격포 1문과 수류탄 2반을 가지로 있었으며,
현지에서 심문한 결과 제9중대 공격에 참가한 베트민군의 패잔병이었다.




한편,
이인수 대위가 지휘하는 제11중대는 7월 27일에 제9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대대예비대로서 대대본부기지 일각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투당일에는 제9중대에 파견되었던 제1소대도 복귀하였으며,
제3소대를 기지 남쪽 프레이 기라오클(Plei Girao Kle)부근에 잠복시키고
별다른 상황이 없자

‘오늘도 접적이 없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 순간 느닷없이 제9중대 지역에 포탄과 소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교전지를 관망하는 예광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서로 교차하고 있었다.

이윽고 자정이 지난 2시간 후에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제9중대를 공격하는 적의 규모는 증강된 1개 대대로 추산된다는 것이었다.
중대는 새벽 3시 30분에 출동명령을 받고, 새벽 5시 30분에 목표를 점령한 다음
제9중대와 패잔병 소탕전에 대한 협조를 마치고 6시에 공격에 나섰다.
이때 제9중대장 이춘근 대위가 출동시킨 미군의 전차 2대의 엄호를 받으며
저항하는 패잔병을 무찌르고, 기지 서쪽 철조망선 부근에서 뒹굴고 있는
시체 30여구를 확인하였다.

또한 100m 뒤의 급조 개인호에서 수 없이 흩어진 시체 사이사이에 숨은
수 미상의 적들이 수류탄과 총격으로 발악하였으나, 샅샅이 뒤져 모두
10명을 사살하고 5명을 사로잡았다.
이때, 아군은 제1 소대의 조희선(趙喜先)병장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혈전장의 총성은 멎었으나 아직도 초연이 자욱한 아침 7시,
여단장 워커(Walker) 준장이 대대장 최병수 중령을 대동하고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는 눈앞에 전개된 모골이 송연한 광경을 보고

“나는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지만, 이와 같이 협소한 진 앞에
이렇게 많은 적병들이 사살된 것은 일찌기 보지 못하였다.”

하며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편, 포로들의 심문으로 제9중대를 공격한 적은
베트콩군 제308사단 제88연대의 둥바이(Dung Yay)대대인 제5대대로 밝혀졌다.
이 공격에 동원된 적의 병력은 제5대대 예하의 4개 중대 400명과 75mm 무반동총,
82mm 박격포, 공병특공대의 3개 중대 300명이 증강된 700명 선으로 추산되었다.

전투결과 확인된 시체 174구외에 운반해 갔을 시체와 부상병들을 추산하면,
적의 손실은 5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므로 글자 그대로 격멸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그때까지 한국군의 중대전술기지 개념의 실효성에
반신반의하던 미군은 종전의 태도를 바꾸고 그 합당성은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미군측은 이를 ‘화이어 베이스(File Base)'라고 명명하고
그 전술적 운용에 대한 연구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필자가 이 전투에 특기하고 싶은 것은
제9중대장 이춘근 대위가 가용한 방어 수단의 통합과 활용을 효과적으로 운용한 점,
포병 제61대대 제3포대의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가
서전의 화급한 상황 하에서도 표적을 정확히 강타하게 한 탁월한 지원화력의 운용과
화집점(火集点)운용의 묘를 살린 점, 종래 하사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던
타성적인 군 내부의 편견에 일침을 가하였다고 볼 수 있는 제9중대 제2소대 선임하사관
이종세 중사와 배속 제12중대 제1소대의 이대일 중사의 놀라운 지휘능력,
화기소대 김태준 중사의 사격태세, 고 박오택 상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적병 5명을
단신으로 무찔러버린 것은 신화와도 같아 감탄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전투는 보병과 포병, 그리고 전차에 의한 협동 작전이 방어 시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전에서 입증한 가장 실감나는 전사(戰史)로 남게 되었다.






자료편집:
www.vietvet.co.kr
/최진현
 


67.68.51.101 김성수:
월남전이 끝난지도 어언 3~4십년이 되었읍니다.
그 오랜 기간이 경과 하였는데도 당시의 모든일들을 이와같이 빠짐없이 기억해 내어 기록으로 적어 놓을수 있는것은 우리들의 기억속에 너무도 생생한 현실이 였으며 특히 한국인 모두에게 잊혀저서는, 무시되어서는 않될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 였기에 이다지도 생생히 기억하여 남겨놓아야 한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감사히 읽어 보았읍니다.
대개 전투수기라 하면 최전방에서 적과 조우하여 격투형식의 숨막히는 혈전을 기대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월남전의 경우에는 대부분 중대단위에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보병 전투 위주로 기록되어 있었던것이 지금까지의 통례였던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글쓴분들이 중대급 이하의, 특히 소대급 이하의 병사일경우 폭넓은 군사지식과 지원체제를 잘 모르고 수기를 썼다는 단점에비해 이 수기는 중대급 뿐만아니라 그 상위급 지원부대의 화력지원체제와 더불어 말단 소총수의 전투상황까지 상세히 보고 기록할수있는 군사지식이 갖추어진 분의 현장수기로 보여지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것이 라고 생각됩니다.
보 전 포 전술이 한자리에모여 조화를 이루는 한폭의 아름다운 전쟁예술을 보는듯 훌륭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20.75.185.44
최진현: 이렇게 읽어보신 소감을 적어주셔서 수고하여 올린 보람을 느낍니다. 리플이 많이 달리면 체험수기를 쓰시는 분들이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03/05-07:09]